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애월읍 2004. 11. 11. 14:51 Posted by jeju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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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파두리 항목유적지(사적 제396호)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역사적 의의]
  이곳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시대 후기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삼별초군이 이에 맞서 끝까지 싸웠던 호국 격전지이다.

[몽골군의 침입과 삼별초]
  몽골(원나라)은 세계 정벌의 일환으로 1231년(고려 고종 18년)부터 고려에 여러차례 쳐들어왔다. 고려는 몽골과의 싸움에서 밀리자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여러 해 동안 대항하였으나 끝내는 몽골에게 굴복하고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에 배중손 등은 자주호국의 기치를 내걸고 고려를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끝까지 지키고자 1270년(고려 원종 11년) 6월 군사를 규합하고 대몽 항전을 결의하였다. 이때 중심이 되었던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삼별초군의 항전과 항파두리의 역사]
  강화도에서 진용을 정비한 삼별초군은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대몽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1271년(고려 원종 12년) 5월 진도가 고려·몽골 연합군에게 함락하자 김통정 장군은 잔여세력을 이끌고 제주도에 들어와 이곳 항파두리에 진지를 마련하고 내·외성을 쌓았다. 특히 외성은 흙과 돌맹이를 섞어서 쌓은 토성으로 그 길이가 15리(6Km)에 달하였으며, 토성 위에는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서 연막전술을 폈다고 한다. 즉 적이 나타났을 때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게 하면 자연히 재가 하늘로 날아 올라 연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를 따라 3백여리에 달하는 환해장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골과 고려 조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삼별초군이 굴복하지 않자 고려의 김방경과 몽골의 혼도가 이끄는 고려·몽골연합군 1만 2천여명이 1273년(고려 원종 14년)4월 함덕포와 비양도로 상륙하여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이에 맞서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김통정 장군은 붉은 오름으로 퇴각한 뒤 자결함으로써 몽골 침입이후 40여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항몽투쟁은 끝이 났으며 제주도에서 최후까지 항쟁한 2년 6개월의 자취가 곧 이 항파두성 사적지이다.

[역사적 의미와 제주사회에 끼친 영향]
  몽골에 점령당한 제주도는 이후 목장을 경영하는 방식이나 언어와 생활습속 등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또 삼별초군과 이들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들어옴으로서 토목과 건축기술, 양잠과 직조기술, 새로운 농경법이 보급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중앙의 문물과 제도, 불교 문화가 이곳 제주도에 전래되었다.

[항파두리에 얽힌 전설]
  이곳 항파두리에는 김통정 장군이 적군이 침입하였을 때 성에서 뛰어 내리면서 밟은 돌에 발자국이 생기고 또 그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는 '장수물'과 삼별초군이 활쏘기를 연습할 때 화살을 맞아 자국이 생겼다는 '살 맞은 돌' 등 여러가지 전설들이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복원]
  항몽 최후의 격전지였던 이곳 항파두리가 호국항쟁의 정신도장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7백여년이 지난 1976년 9월 9일 제주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 1978년 6월에는 유적지 복원사업에 따라 항몽순의비를 비롯하여 전시관·관리사 등이 설치 되었고 1997년 4월 18일에는 국가 지정 사적 제396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삼별초군의 자주호국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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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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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유적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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